[콘경트렌드] 디지털 시대에 살아남은 '영국 서점의 비밀'

기사입력:2018-06-14 13:5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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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경제 정선오 기자] 영국인은 책과 가깝다. 독서는 영국인들이 티타임 못지않게 즐기는 여가생활이다. 책을 벗삼아 삶을 즐긴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영국인 10명 중 8명이 책을 읽는다. 10명 중 3명은 매일 책을 편다. 여기에 습관적으로 책을 읽는 영국인 비율을 더하면 51.8%로 늘어난다. 책과 가깝기 때문일까. 이 섬나라는 조지 오웰, 찰스 디킨스, 제인 오스틴, J.R.R 톨킨, 조앤 K. 롤링 등 굵직굵직한 작가들을 배출해내게 됐다. BBC뉴스에서는 매년 세계 3대 문학상 ‘맨부커상’을 생중계하며 ‘문학의 나라’란 사실을 과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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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팅힐〉 의 한 장면 (사진=〈노팅힐〉 갈무리)

영국 서점은 영국 문화를 압축한 그릇이다. 영국인의 독서와 문학을 갈무리한 공간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대에 온라인 서점이 오프라인 서점을 집어삼키고 있지만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국 문화 콘텐츠가 만들어낸 이야기들 덕분이기도 하다. 이들 서점에서는 영화 <노팅힐>이나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장면들처럼 꿈같은 장면이 펼쳐지거나 고된 삶에 대한 해결책이 금방이라도 나올 듯하다. 하지만 숨은 저력은 다른 곳에 있다.

영국 서점의 힘은 ‘아날로그’다. 아날로그 감성으로 무장했다. 속도와 효율을 중시하는 시대에 느리고 인간다운 선택을 했다. 이들은 사람이 책을 산다는 생각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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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해차드 전경 (사진=Hatchard)

영국 서점 중 아날로그의 대명사는 1798년 문을 연 ‘해차드(Hatchard)’다. 200년 된 서점 해차드는 박물관이나 유서 깊은 도서관에 가깝다. 매장은 짙은 나무 향기와 종이 냄새가 가득 차있다. 영국의 지성을 대변한 작가들의 사인이나 100년 이상 된 서적들도 곳곳에 비치돼있다.

이 서점을 가득 메운 것은 향이나 기념품만이 아니다. 200년간 누적된 문학인들의 시선도 서점 곳곳에 등장한다. 가장 주요한 시선은 ‘해차드의 시선’이다. 서점에서 엄선한 책들로 ‘시선’을 채운다. 국내 서점에서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등장하는 ‘베스트 셀러 목록’은 없다. 해차드는 베스트셀러 대신 자신들이 고른 책에 설명을 덧붙여 컬렉션을 만든다. 설명도 손글씨로 적어둔다. 이 시선을 보기 위해서 해차드에 다닐만큼 ‘신뢰도’가 높다. 해차드식 ‘아날로그 큐레이션’이다.

해차드의 아날로그 큐레이션은 그곳의 시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해차드는 일반 분류표를 버리고 테마를 취했다. 해차드에 가면 천편일률적인 장르구분이나 도서분류법을 보기 쉽지 않다. 책 구분이 ‘테마별’로 돼있다. 예컨대 ‘엘리자베스 여왕’을 주제로 젊은 시절 그녀가 봤던 책들과 왕실 관련 서적을 모아 둔다. 또 어느 책 속의 구절과 비슷한 기분을 들게 하는 책들로 섹션을 만들어 두기도 한다. ‘흥망성쇠’를 테마로 국가나 기업, 인물의 흥망성쇠를 다룬 책들만 쌓아두기도 한다. 영국 출신 작가의 책들만 진열해 놓는 선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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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타야 히라카타 역 본점 (사진=위키피디아)

해차드의 힘은 ‘제안 능력’이다. 선택하는 기술이 그들의 저력이다. 일본 CCC의 CEO 마쓰다 무네아키는 제안능력을 “고객에게 높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상품을 찾아주고, 선택해 주고, 제안해 주는 사람”이라며 “중요한 고객가치를 낳을 수 있으며 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게 해주는 자원이다”라고 설명한다.

제안 능력은 돈으로 쌓을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응축된 자본이 요구된다. 무네아키는 이를 ‘지적자본’이라 칭한다. “지적자본이 얼마나 축적돼있는가에 따라 해당 플랫폼의 사활이 결정된다”고까지 강조한다.

실제 CCC의 츠타야 서점은 해차드 서점이 그랬듯, 제안 내용에 따른 서적 분류로 매장을 재구축했다. 츠타야 서점은 고객에게 질문한다. 예컨대 “유럽 여행을 가면 이러한 문화를 접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라는 식으로 제안을 한다. 츠타야 서가는 이 맥락에 따라 유럽 여행 서가에 해당 국가 식문화나 축제, 건축, 역사 관련 책들도 함께 진열한다. 해차드가 시선을 구축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디지털 물결은 종이 시대에 막을 내리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하지만 풍파에도 고목은 우직하게 서있듯, 서점들은 수십 수백년 쌓은 지적자본을 통해 디지털 시대를 항해하고 있다. 아날로그 큐레이션이야말로 서점들의 힘이다.

<참고문헌>

영국서점, 아날로그식 큐레이션의 힘, KOCCA, 2017.11-12, N-CONTENTS Vol.03
해외 주요국의 독서실태 및독서문화진흥정책 사례 연구, 2015, 문화체육관광부
지적자본론, 마스다무네아키, 민음사


정선오 기자 news@